Texts
2024.10./단체전
⟪빛나는 순간을 더듬어⟫ 서문
빛나는 순간을 더듬어
전희정
지난 날을 돌아보면 끝없이 이어지던 동굴이 있다. 짙게 드리워진 어둠에 손을 뻗어보지만 그저 허공일 뿐 몸을 지탱할 그 어떤 것도 잡히지 않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을 애써 깜빡이며 한 걸음 내디디면 끈적한 어둠이 발목에 엉겨붙어 밑으로 밑으로 잡아당긴다. 더 가라앉기 전에 다시 한 발 내딛고, 어디라도 닿기 위해 팔을 크게 휘두른다. 숨을 몰아쉬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앞을 향해 눈을 크게 뜬다. 무엇이라도 눈에 비치길 간절히 바라며.
여기, 어둠을 지나고 있는 세 작가가 있다. 이제 막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김기찬, 김륜아, 신재민은 각자의 방식으로 고민하며 갈고닦은 자신들의 작업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다. 서로 다른 관심사와 표현방식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작업은 뒤편에 묻어두고 애써 찾지 않았던 동굴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그 어둠을 지날때 허우적대던 손은 무엇인가를 움켜쥐었었고, 휘청대는 발은 단단한 땅을 밟았으며, 크게 벌린 눈에는 잠시 상이 맺혔었다. 그것은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절실하게 희망적이었던 빛나는 순간에 대한 기억이다.
터질 것 같은 내면의 소리를 꾹꾹 눌러담은 듯한 김륜아의 화면은 색과 선으로 가득 차있다. 몸에 대한 고통스러운 고찰과 쉴새없이 터지는 플래시처럼 다채로운 풍경의 기억은 화면을 찢을 듯 터져나오고, 음악과 몸이 동기화되어 흘러나온 드로잉은 화면 위를 춤춘다. 그녀는 맞닥뜨린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의 안으로 끌어들여 치열하게 싸운 후 내뱉어버린다. 어둠 속에서 꽉 움켜쥔 순간을 놓칠세라 폭풍처럼 쏟아낸 그녀는 그제야 말간 얼굴을 든다.
오로지 종이와 연필, 지우개로 일상의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김기찬은 동시에 그리는 일 없이 한 번에 한점씩 그린다. 주로 작업실과 집을 오가는 단조롭고 규칙적인 그의 일과에서 대부분의 시간은 하나의 풍경에 바쳐진다. 그 어느것도 놓치지 않고 생생하게 그려진 아주 작은 화면에는 집요함이, 희미하게 보여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을 그대로 그린 큰 화면에는 겸허함이 있다. 그는 그렇게 모든 순간에 고요하게 몰입하여 풍경 깊숙이, 한 발 한 발 들어간다.
신재민의 회화에는 낯설고도 친밀한 세계가 있다. 그는 좋아하는 곳을 걸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이 세계와 저 세계 간의 구분이 없는 하나의 세계를 꿈꾼다. 자연에서 찾아보기 힘든 색을 골라 익숙한 거리를 그리고, 그 위에 머리를 스쳤던 잔상들을 올려놓는다. 그의 작품에서 나뭇잎, 비, 하늘, 얼굴과 같은 자연물은 모듈화되어 새로운 세상의 규칙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신재민은 오늘도 산책하며 자신만의 겹쳐진 세계를 눈에 담는다.
지금도 눈앞은 여전히 어둠이다. 사실 어둠은 지난날에 통과했던 짧은 터널이 아닌 삶을 채우는 불확실성이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서 삶을 이어가기 위해 애쓰는 존재들이다. 때로 이 모든 것을 견디기 위해 지나간 일이라 여기며 어둠에서 눈을 돌린 채 살아가기도 한다. 그런 어둠 속을 이 어린 세 작가는 빛나는 순간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내 눈앞의 어둠과 마주 선다. 그리고 간절히 바바본다.
빛나는 순간을 본 그 눈이, 빛을 더듬었던 손의 감촉이, 빛을 좇아 한 걸음 내디딘 그 발걸음이, 그 모든 기억들이 다시 빛이 되어 이 어둠을 밝혀주기를.
전희정
갤러리소소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