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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신재민 개인전: ⟪뉴 호라이즌스⟫ 글





뉴 호라이즌스


문소영











납작한 공백의 영역—회화는 화면 너머에 존재하는 미지의 영역을 찾아내는 일이다. 수평선 너머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 있음을 몸소 증명한 최초의 항해사의 용기처럼, 캔버스 속에 더 넓은 세계가 있음을 믿고 그 감각을 유지해야 한다. 신재민에게 회화는 사유와 일상의 궤적을 심리스(seamless) 오픈 월드 게임의 형태로 드러내는 것이다. 오픈 월드 게임은 유저의 자유도가 높아, 개발자가 정해 놓은 결과에 맞춰 이야기가 선형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유저가 유기적으로 세계를 탐험하며 자신만의 루트를 구축할 수 있다. 게임 속에서 산책을 하거나 다른 길로 새는 것이 가능하며, 소소한 이벤트를 즐기거나 발견한 재료들로 자신만의 아이템이나 건축물을 만들 수도 있다. 오픈 월드 게임이 유저의 재미를 위해 공간 곳곳에 다양한 요소를 흩뿌려 놓은 것처럼, 좋은 풍경에는 여지가 필요하다. 신재민이 오픈 월드 게임의 특성을 회화에 적용하는 이유는, 게임의 상호작용성을 회화를 전개하기 위한 방법론에 반영하여 양방향적이고 유기적인 서사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기 위함이다. 플레이스막2에서 개최된 《뉴 호라이즌스》에서는 말랑하게 존재하는 실재를 회화로 구체화하기 위한 신재민의 고민과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신재민에게 풍경은 회화를 통해 이음새 없이 펼쳐지는 오픈 월드를 여정하는 것이다. 그가 회화를 통해 펼치는 지형은 디지털 세상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작가가 일상을 통해 체험하는 물리적인 환경과도 연결된다. 그는 산책을 통해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산책 중에 바라본 장면들, 사색을 통해 떠오르는 여러 감정의 형상들, 그리고 습관적으로 진행되는 낙서들을 재료로 그림을 그린다. 작가에게 회화는 꿈결처럼 시선에 달라붙는 기억이나 감정의 형상들을 실재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림 속에는 작가의 세계가 낯설지만 다정해 보이는 도상들이 무해하게 펼쳐지며, 그 속으로 진입한 이들에게 세계를 이해하고 탐구하는 방법을 강요하지 않는다. 신재민의 오픈월드는 대상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거시적인 풍경으로 발전해가는 중이다. 《뉴 호라이즌스》에 전시된 작업 중 <가디언 출신 천족 예술가>(2022)나 <콩이네>(2023)와 같이 상대적으로 먼저 진행된 작업들은 풍경보다는 정물처럼 도상을 본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시기는 회화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리해 보기 위해 영웅, 검, 페르소나, 들꽃처럼 파편적으로 떠오른 대상에 개별적으로 집중해 보던 시기였다. 이렇게 물체에 초점이 맞추어 있던 작업으로부터, 근작으로 다가올수록 관념적인 부분보다는 시공간적인 풍경으로 시점이 확장된다. 스펙트럼의 확장은 작가가 자신의 조형언어를 실험하고 다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최근엔 세계관의 토대를 견고히 하되 서서히 화면을 비워나가며, 확장되는 풍경에 온전히 주목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신재민의 풍경은 너른 시야에 드리워지는 백일몽처럼 꿈과 현실을 골고루 감싸고, 물리적으로 현상하는 것으로부터 끝없이 확장되는 가상의 세계를 아우른다. 두 세계는 분리되지 않고 작가의 삶 속에서 융합되고 공존한다. 그는 사물의 표면에 깃든 (어쩌면 이면이 되어버린) 감정에 집중한다. 물질은 현실과 가상의 벽을 투과할 수 없지만, 모의 현실인 꿈속에서 느낀 기쁨과 슬픔이 가짜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감정과 감각은 어디서든 실재한다. 산책은 단순히 몸을 이동하는 일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 없이 어딘가를 거닐며 호흡과 생각을 환기하는 일이다. 그는 산책을 통해 주변 환경을 관찰하고 그 안에 깃든 요소들을 발견하는데, 오픈 월드 게임 속 지형과 환경을 탐구하는 것도 포함된다. 신재민은 시공간에 위계를 두지 않고, 몸으로 기억하는 길이나 눈과 머리로 체험하는 길을 동등하게 여긴다. 게임 속 세상을 거니는 것과 발품을 팔아 돌아다니는 것을 같은 체험으로 여기며, 그 안에서 발견한 요소들을 인벤토리에 아이템을 저장하듯 기록한다. 지구와 디지털 세상을 가리지 않고 체득된 장면들은 회화 안에서 중첩된다. 다중적인 세계를 솔기 없이 이어나가는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일상에서 분리하지 않는다. 자연 친화적인 재료를 써서 신체에 부담을 덜 준다거나, 작업의 시작과 끝을 마무리하는 루틴을 정해 몰입을 흐트러트리지 않으려 한다. 발견한 장면들은 사진이나 스케치 속에 담기기도 하고, 때로는 낙서되기도 한다. 낙서는 손에 동화된 눈의 움직임을 떠올리며, ‘그리기’에 집중하는 일이다. 그의 작업에서 낙서는 무의식에 시그널을 보내고 손을 통해 전보처럼 이미지를 전달받거나, 때로는 긍정적인 미래를 소망하고 마음을 가다듬는 의식이 되기도 한다. 신재민은 낙서를 통해 마주하거나 경험했던 것들이 내면에 어떻게 잔류하고 있는지 톺아본다.

신재민은 안료와 미디엄 같은 입자의 엉김이 일궈내는 회화의 물리적 실체와 작가의 심상을 펼쳐낼 토대이자 ‘가상’으로 존재하는 회화의 양면성에 주목한다. 그는 유화를 주로 다루지만, 이는 앞서 말한 회화에 양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성과 가상성을 중화시키기 위한 연구의 일환이다. 그에게 물감의 안료와 디지털 드로잉의 픽셀은 작가의 필적을 구축하는 입자로서 동등한 위계를 가진다. 언어를 번역하기 위해서 말의 근본을 파악하고 문장을 분해하고 재조립해야 하는 것처럼, 신재민은 부유하던 생각과 감각을 회화를 통해 자신의 세계로 온전히 환원하기 위한 가장 순수한 단위1를 추적한다. 이는 작가가 평소 정보에 다가갈 때 근본을 파악하려는 태도로부터 비롯된다. 신재민은 이미지의 최소 단위는 기하학이라는 생각을 했다. 기하학의 요소가 작업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회화의 물질적 성격과 가상의 세계를 드러내는 매개로서의 양면적 성격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정리하고, 평면을 구상할 수 있게 돕는다. 점, 선, 면, 그리고 원, 세모, 네모 같은 균형을 이루는 요소들이 정처 없이 떠도는 생각들을 한 세계로서 존재하게 하는 유연한 질서를 부여한다. 그는 무한대를 더 이상 나눌 수 없을 때까지 쪼개었을 때 남는 최소의 단위이자 원점(0,0)을 상징하는 추상적 개념인 모나드(Monad, 1)나 반복과 새로운 모나드(시작)를 상징하는 데카드(Decad, 10) 같은 수비학의 개념을 통해 형상을 연구해 보기도 하고, 프로그램에 좌표를 입력하여 코드를 이미지로 소환한 뒤 그것을 다시 <퍼펙트 월드>(2023)로 그려내기도 했다.

신재민에게 회화는 자신의 세계를 온전히 펼치기 위한 발판이다. 그가 천착해온 회화는 평면의 지지체라는 조건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이는 이야기를 납작하게 편집하기 위함이 아니라 서사를 더 넓은 지형으로 확장하는 다른 세계로의 포털을 개방하기 위함이다. 회화는 작가만의 시점으로 새로운 중력과 시공간을 구축할 수 있는 매체이다. 그에게 캔버스와 프레임은 장면을 박제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이면으로 더 멀리 바라보고 나아갈 수 있음을 알리는 입구이다. 회화가 작가를 매개로 포착된 시공간이라고 생각해 보자. 시간은 어딘가에 고여있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사실 허구이며, 우리가 시간이라고 믿는 것들은 과거, 지금, 미래라고 여겨지는 임시 단위로 체감되는 경험들이다. 시공간은 무작위로 벌어지는 사건을 정리하여 납득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공유될 수 있게 한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며 역행할 수 없다는 고집스러운 위계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위계는 감각 속에서 희미해진다. 꿈과 현실, 가상과 실재, 그리고 과거와 미래는 늘 포개져 있고, 화가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여러 시간이 맞닿은 자리에 존재하는 지금을 포착한다. 회화는 영원히 불어나는 시간을 납작하게 드러낸다. 반대로 말하자면, 캔버스는 작가의 세계를 무한히 펼칠 수 있는 창구가 된다. 작가가 자유롭게 차원과 중력을 펼쳐낼 수 있기에 드러난 적 없는 것, 잡히지 않지만 명확한 것들을 드러낼 수 있다. 그렇기에 회화는 실체 없이 부유하는 것들에게 지반과 그곳을 디딜 수 있는 발을 부여하는 다정한 행위이다. 신재민은 자신의 세계를 정리하기 위한 공식을 찾고 있다. 무언가를 고착시키거나 패턴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더 멀리 도약하여 더 넓은 세상을 탐험하기 위한 공식 말이다. 단단한 기저를 가졌지만 유연해서 얼마든지 새로운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는 풍경을 기대해 본다.


1 쿼크(Quark)


문소영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큐레이터